
이제 한국영화계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기보다 여성의 달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열 번째 축제를 한 해 앞둔 제9회 서울여성영화제가 4월 5일부터 12일까지 8일간 신촌 아트레온에서 개최된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이제 친숙하지만 올해는 좀 더 진보적인 이슈에 눈을 돌렸다. 이주노동 혹은 국제결혼을 통해 서구로, 같은 아시아로 이주한 여성들, 제국의 힘에 억압당하는 여성들, 청소녀 들과 레즈비언의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응시하는 ‘이주여성 특별전: 우리는 이곳에 살고 있다!’, ‘제국과 여성’, ‘청소녀 특별전: 걸즈 온 필름’, ‘퀴어 레인보우’ 등의 섹션이 마련된 것. 또 헝가리 마르타 메자로스 특별전과 개막작 <안토니아> 등 작가 감독과 신인 감독들의 작품이 풍성하게 어우러진 것도 올해만의 경향이다. 29개국 100편의 상영작 중 프로그래머들이 강추하는 13편의 영화를 엄선해 봤다.
<안토니아>(타타 아마랄/브라질/2006/90분/35mm/Color/드라마)

힙합 소녀들의 활약을 기대하시라. 브라질 상파울로의 ‘힙합신’과 성장기를 네 소녀들의 시점으로 엿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변두리 지역에서 자란 네 흑인 소녀는 음악으로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힙합 그룹 ‘안토니아’를 결성한다. 하지만 쇼 비지니스계의 엄혹한 논리와 가난, 그리고 그들 앞에 닥치는 폭력적인 사건들은 소녀들에게 녹록치 않은 세상의 질서를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거친 현실을 힙합 정신으로 헤쳐 나가는 네 소녀를 그린 음악영화이자 성장영화. 상파울루 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만큼 대중성을 겸비한 <안토니아>는 풍부한 국내외 영화제 수상경험을 가진 타타 아마랄 감독의 ‘상파울로 3부작’의 마무리다. 아마랄 감독은 1997년 데뷔작 <별이 빛나는 하늘>로 1990년대 브라질영화 ‘넘버3’로 꼽혔으며,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미국, 프랑스 등 각국 영화제에서 총 18개의 상을 수상한 스타 감독이다.
<그림자로 살다>(마리나 스파다/이탈리아/2006/87분/35mm/Color/드라마)

마리나 스파다는 첫 장편영화 < Forza Cani >를 이탈리아 최초의 디지털 독립영화로 완성한 바 있다. 그 만큼 실험성과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겸비한 감독으로 그녀의 최신작 <그림자로 살다>는 서울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정사>의 여성판으로 불리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서른 살 클라우디아와 그보다 약간 어린 우크라이나 여성 올가. 이중 클라우디아는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에 온 보리스라는 40대에 핸섬한 선생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여름 휴가차 떠난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소박한 올가 사이에 급속도로 빠른 우정이 피어나고, 클라우디아가 그리스로 떠나기 직전 올가가 실종되면서 영화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대책없는 인생>(베라 히틸로바/체코/2006/108분/35mm/Color/드라마)

제7회 서울여성영화제가 회고전을 바쳤던 베라 히틸로바 감독의 최신작. 그는 1960년대 시네마 베리떼의 객관성과 프랑스 누벨 바그의 주관성을 계승했던 체코 뉴 웨이브를 이끌었으며 날카로운 사회 풍자로 유명하다. 주인공은 아들을 둔 기혼여성이자 심리학자인 하나. 수많은 인물들이 그녀를 찾아 고민을 털어놓는데 베라 히틸로바 감독은 여기서 체코 사회를 은유할 수 있는 여섯 명의 캐릭터로 추려 놓았다. 정신 상담을 통해 인간존재의 희노애락, 그리고 상식과 비상식을 넘나드는 욕망의 갈구가 가감 없이 펼쳐진다.
<사각의 링 위에서>(마갈리 리샤르-세라노/프랑스/2006/93분/35mm/Color/드라마)

킥복싱 혹은 프랑스 혹은 여성주의 판 <밀리언 달러 베이비>. 조셉은 딸 앤지와 조카 안젤라를 프랑스 킥복싱 챔피언으로 만들려는 킥 복싱 사범. 그 세 사람에게 킥복싱은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일부분이지만 조셉의 아내 테레사는 무식한 격투기에 집착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표면적으로 유지되던 가정의 평화는 앤지가 프랑스 챔피언십에서 패배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안젤라와도 멀어진 앤지는 결국 어머니의 길을 따르고자 한다. 남자들의 격투기에 진입하려는 여성, 이 시놉시스만으로도 격렬한 화면과 섬세한 여성적 감수성의 충돌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단편 작업과 글쓰기, 시나리오 작업을 병행해 왔던 마갈리 리샤르-세라노 감독의 데뷔작이다.
<사운드 조각>(알란테 카바이테/프랑스/2006/87분/35mm/Color/미스터리)

여성주의 시각으로 풀어 낸 미스터리 스릴러는 어떤 빛깔일까. <사운드 조각>은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프랑스 산 미스터리영화다. 어느 날 사운드 엔지니어 샤를롯의 어머니가 살해된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들자 샤를롯은 직접 어머니의 집을 찾아 사건을 해결코자 한다. 점점 얼마나 자신이 어머니에게 무심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샤를롯. 어느 날 무심코 설치한 녹음 장비를 통해 어머니의 비밀과 음산한 시골 마을의 음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청각과 녹음장비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필사의 추적>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체험이 될 듯.
<베트남 처녀를 찾습니다>(미라벨 앙/미국/2006/48min/Digi-Beta/Color/다큐멘터리)

제목만 보고서 우리 단편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나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를 떠올릴 관객이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아트 인스티튜트 졸업한 미라벨 앙 감독은 장르의 외피를 가져와 매매혼 제도를 포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베트남 호치민 시의 결혼 알선 업체를 찾은 싱가폴 남자의 5일 간의 여정은 시네마 베리떼 양식으로 적나라하게 까발려 진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80여 명 이상의 베트남 처녀를 만나고, 입국 5일 만에 결혼한 이 38세 남성의 이야기는 충격과 다양한 의문점을 던져 주기에 충분하다.
<입양>(마르타 메자로스/헝가리/1975/88분/35mm/B&W/드라마)

두 아이를 둔 유부남 요시카를 사랑하는 43살 카타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어느 날 보호소에 사는 소녀 안나가 남자 친구가 찾아오는 며칠간만 집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실랑이 끝에 안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카타. 사소한 감정 다툼으로 싸우고 중앙 보호소로 보내진 안나를 이해하게 된 카타는 그 소녀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와중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올 감독 특별전의 주인공인 헝가리의 거장 마르타 메자로스의 대표작이며 제2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카타라는 주인공을 통해 여성과 출산, 사랑 등의 화두를 교차하는 거장의 손길을 느껴 보시길.
<걸 엑싱> 
‘릴 걸즈’는 2001년에 활동을 시작한 미국의 영상운동집단. 다문화 여성 미디어 전문가들이 미디어 이미지의 비판적인 분석과 제작에 관련된 기술을 매해 70명의 청소녀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걸 엑싱>은 2006년 16~19세의 소녀들이 만든 작품들 중 뛰어난 7편의 작품을 엄선한 옴니버스 모음집이다. 이 서툰 감독들은 5분 이내의 짧은 시간동안 성장드라마와 실험영화, 다큐멘터리와 뮤직비디오라는 자유분방한 형식을 경유해 자신들의 고민과 내면의 울림을 솔직하게 담아내고 있다. 약물중독, 매춘, 10대 임신, 자살충동, 임신, 가족, 성장, 그리고 무엇보다 10대라는 것에 대한 고백을 듣고 있자면 공감과 감흥이 밀려올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에너벨>(캐서린 브룩스/미국/2006/77분/Beta/Color/성장드라마)

가톨릭 기숙학교처럼 외부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또 있을까. 금기가 많을수록 일탈이 늘어나는 법, 애너벨이 교사 사이먼과 사랑에 빠지는 곳도 바로 성 테레사 기숙학교다. 여기 의욕 넘치는 젊은 교사이자 시인 사이먼과 팔방미인에 매력 넘치는 신입생 애너벨 사이에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농담을 섞자면 이 책임은 요주의 인물 애너벨을 사이먼에게 예의 주시하라고 시킨 고지식한 교장 선생님 탓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애너벨>은 독일의 고전 <제복의 처녀>에서 영감을 받은 ‘금지된 사랑’의 현대전 버전이다. <리얼월드> 등 MTV와 폭스의 수많은 TV시리즈와 단편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32살 케서린 브룩스 감독의 재능이 반짝이는 작품. 미국 독립영화 안에서 활약하는 젊은 여성 감독의 현재형을 확인해 보시라.
<8월 이야기>(얀얀 막/홍콩/2006/53분/Beta/Color/성장드라마)

누구나 겪었을 사랑과 우정사이, 혹은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시작은 소설가 찬 와이가 ‘포 시즌스 Four Seasons’라는 노래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8월 이야기 August Story’에서 비롯됐다. 어느 여름 17세의 유키는 삼촌의 양복점에서 젊은 수습생 핑온을 우연히 발견한다. 그 즈음 같은 반 친구가 될 와이퐁과도 속내 깊은 우정 나누게 된다. 자, 이제 와이퐁은 유키, 유키는 핑온, 핑온은 와이퐁을 좋아하는 청춘들의 특권과도 같은 풋풋한 사랑이 시작된다. 졸업 단편 <스냅샷>으로 홍콩국제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얀얀 막은 이제 홍콩을 대표할 여류 감독으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두 번째 장편 <나비>는 2004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비평가 주간 개막작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젊은 날 누구라도 한번쯤 꿈꿨을 수채화 같은 아련함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나의 집은 너의 전장>(카일리 그레이/호주/2006/52분/Beta/Color/다큐멘터리)

20세기에 아우슈비츠가 있었다면 21세기의 첫 10년에는 이라크가 있다. 인권과 사회를 주제로 한 다큐 작업을 계속해 온 호주의 카일리 그레이 감독은 전쟁의 포화 속에 렌즈를 들이 댄다. 미군의 이라크 침공이 개시되기 전부터 이후까지 3년 간 촬영된 이 작품은 이라크의 평범한 한 가정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다. 이미 <필리핀의 어린죄수들>과 <중동의 낙타 기수> 등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늦추지 않았던 이 기자 출신 감독은 개인과 사회를 교차시키며 관객들에게 현재 중동에서의 여성의 삶을 직시하게 만든다. 전쟁의 흉포함이 일상을 침범했던 그들의 실상과 공포의 기록은 단순한 역사의 기록인 동시에 이를 감내해야 하는 여성과 개인의 심리 보고서이기도 하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전쟁과 테러에 억압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는 ‘제국과 여성’ 섹션을 대표할 만할 작품.
<이티비티티티 위원회>(제이미 배빗/미국/2007/85분/Digi-Beta/Color/코미디)

‘행동하는 클리토리스 Clits in Action’라니 급진적 페미니즘의 내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여자 친구에게 차인 아나는 대학입학도 거절당하고 루저의 길로 입문하려는 상태. 어느 날, 성형외과 앞 문에다가 ‘여성의 몸은 자신의 것’이라는 낙서를 끄적이고 있는 새디를 발견한다. 그 때부터 섹시한 급진 페미니스트 펑크 그룹의 리더 새디는 아나를 신세계로 인도한다. 관습에서 탈피한 10대 영화 <하지만 나는 치어리더인 걸>로 주목받은 제이미 배빗 감독은 좀 더 속도감 있는 영화로 관객들을 유혹한다. 범상치 않은 소재일수록 코미디와 같은 유한 화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마도 그녀가 다수의 TV시리즈를 거치며 체득한 생존 전략일 듯. 그럼에도 모뉴먼트 마운틴 앞 기둥 탑에 남자성기로 그린 뒤 폭발시켜버리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 Out: 이반검열 두 번째 이야기 >(여성영상집단 움/한국/2007/90분/DV/Color/다큐멘터리)

학교 내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는 실상을 담아 충격을 줬던 <이반검열>은 지난 2005년 인권영화제와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를 고민하는 고등학생 초이와 레즈비언임을 확신하다 호모포비아를 가진 남자친구를 사귀게 된 천재, 그리고 동생에게 아웃팅을 당해 왕따를 당하는 꼬마다. 2001년 결성된 여성영상집단 ‘움’은 “영상을 통한 여성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영상운동단체. ‘움’이 포착한 동성애자와 레즈비언들, 게다가 고등학생인 이들이 겪어내야 할 고통은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