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모품

창틀위의 먼지 | 2010-09-1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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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봉투도 살 겸

세탁물도 찾아올 겸

그러나 무엇보다 고무줄 늘어난  딱 한개 빼놓고 몽땅 어디론가 사라진 머리끈을 구하러 집을 나섰다.

머리끈이라는 게 나한테는 일 년에 서너번씩은 바꿔야 하는 소모품 중 하나인데

머리를 풀었다 묶었다 자주 반복하느라 가방이며 주머니 때로는 손목까지 거치면서

결국 한 시즌만 지나면 10개 들이 한 묶음을 샀어도 몽땅 사라지게 되는 이상한 소모품인 것이다.

비싼 것도 예쁜 것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라지곤 하니

결국  물건 자체의 소모라기보다

기억의 소모로 인해 발생하는 낭비인 셈이다.

그렇게 사라진 물건들은 분명 철 지난 옷이나 가방 속,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어있을 것이 뻔한데도

신기하게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미스터리를 품고 있기도 하다.

마치 다시 찾을 수 없는 기억처럼 말이다.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은 아니다. 꼭 그런건 아니다.

툭하면 잃어버리는 사람도 아니고 좀처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도 아니지만

초등학생 때 버스 안에 우산을 두 번 놓고 내렸다는 사실로 인해

한 동네 살던 고모들에게 볼 때마다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아이'라고 핀잔을 들었던 기억 때문에

내가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이라는 강박에 오랫동안 사로잡혔었다.

정리정돈을 거의 못하는 성격으로 타고난데다(부친의 방과 책상을 보면 내 방과 책상과 정말 똑같다!!)

그 쪽으로는 빡센(?) 훈련이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보니(하다못해 남편조차도 내게 필적할 만한 기초생활습관 무능력자)

'영원히 찾지 못하는'일은 더러 있지만 '잃어버리는 일'은 그닥 많지 않다. 그 뿐이다.

내게 억울한 딱지를 붙였던 고모들은- 아버지의 사촌들이니 따지고 들면 5촌이지만-

우왁스러운데가 있어서 우리 식구들과 좀 맞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촌이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그들에게 남다른 정이 있었던

무녀독남 아버지와 할머니와 달리

우왁스럽고 욕심많은 건 질색을 하는 엄마와 내가 특히 고모들과 맞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무차별적인(그리고 내가 결코 요구하지 않았던) 애정의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던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 서서히 멀리하기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지금 그 집과 우리집은 인연을 끊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액세서리 가게를 헤매다가

그나마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걸 간신히 한 묶음 사서 포장을 뜯어보니

싸구려 특유의 냄새가 진동을 해 베란다에 널어두었다.

올 가을이 지나 머리를 묶을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

밥 먹을 때, 씻을 때, 일할 때, 더울 때

혹은 풀어헤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엉망일 때 유용한 소품이 되어줄 것이다.

 

 

사라진 기억도 이렇게 새로 사서 채워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그것이 꼭 행복한 일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물건도 기억도 계속해서 조금씩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할 것이다.

 

 

 

+ 싸움의 기술

길 위에서 | 2010-02-25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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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 명절을 앞두고 대목장이 섰다.

정류장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다.

타야 할 버스는 100m 앞 사거리에서 30분 동안 멈춰서 있다.

참는다. 달리 도리가 없다.

 

#2

꼬이고 엉킨 사거리를 간신히 빠져나온 버스에 올라탄다.

운 좋게도 좌석버스 안쪽에 자리가 하나 있다.

바깥쪽 아줌마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아줌마가 내린다.

 

#3

누군가가 털썩 앉는다.

매너가 나쁘다 생각하며 여자는 인상을 쓰고 그 순간 코를 찌르는 술 냄새를 느낀다.

술 취한 남자는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여자를 쳐다본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여자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일진이 안 좋다고 생각한다.

남자의 손목에는 올챙이 모양의 문신이 있었다.

뭔가를 그리려다가 실패한 흔적이었다.

기껏 애인 이름이나 써보려고 했는지,

그러나 이름 석 자 중 성씨 하나 못 파고 동그라미 하나로 끝난 문신에서 실소가 터졌다.

술 취한 남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여자에게 건넨다.

무성의한 대꾸-짜증-무시의 순서를 밟은 후 여자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술 취한 남자를 상대하고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여자는 비교적 고집이 세다.

무시에도 일가견이 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끝까지 무시할 자신이 있다.

 

#4

남자는 말로 안 되자 여자의 팔뚝을 찌르기 시작한다.

여자의 손에 든 커피를 손으로 가로채려는 동작까지 보인다.

여자는 이런 상황을 정말 싫어한다.

남의 소중한 일상을 이런 식으로 한심하고 남루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매우 증오한다.

피하거나 내릴 결심을 하고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자가 남자를 지나 내리려는 순간 남자는 여자의 허벅지를 붙잡고 늘어진다.

 

#5

여자는 폭발한다.

여자는 평소에 얌전한 편이다.

짜증은 종종 내지만 호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종종 불뚝 성미가 튀어나올 때가 있고,

몇 년에 한번 씩 크게 터질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곤 한다.

여자는 남자를 닥치는 대로 패기 시작한다.

여자는 이럴 때 비명을 지르거나 울거나 하는 비교적 교양 있는(?) 반응을 보이지 못한

다.

물론 버스가 떠나갈 정도의 고함과 욕설도 퍼부었다.

 

#6

의외의 공격을 당한 남자는 당황한다.

버스 안의 일부 승객이 남자를 비난한다.

버스 기사는 파출소 앞에 세워주겠으니 잠시만 참으라고 한다.

여자는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남자를 하차시키지 않으면 내가 내릴 테니 빨리 결정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물론 내릴 마음은 없었다.

대중교통 수단에서의 싸움은, 먼저 내리는 놈이 지는 거다.

게다가 오래 기다려, 자리까지 잡은 버스 아닌가.

남자는 여자의 목소리가 잠시 가라앉자 다시 여자에게 시비를 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난 아픈 사람이에요.

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다리를 구부려 자기 머리 뒤로 넘기는 우스꽝스런 동작을 한다. 그 모습 그대로 창밖으

로 보이는 하천에 수장시키고 싶었다)

 

#7

기사는 차를 세우고 남자를 끌어내린다.

이 때 남자의 품에서 서류 뭉치와 함께 오징어가 떨어진다.

아, 오징어라니.

그는 소중한 오징어를 품에 안고 어찌 그리 경거망동을 했는가.

여자는 남자가 내린 뒤에도 남자의 소지품과 함께 긴 시간을 가야할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잽싸게 오징어와 종이뭉치를 집어 들어 남자 품에 퍽 안긴다.

강제 하차 당한 후에도 버스를 붙잡고 늘어지는 남자 때문에 차는 출발하지 못하고

승객들의 짜증도 고조된다.

화가 난 기사는 경찰에 신고를 한다.

기사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는 남자에게 손님 성추행으로 고발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운전석 뒷자리에 검은 모직코트를 단정히 걸어놓은 점잖은 기사는

아마도 자기 입으로 ‘성추행’이라는 낱말을 소리 내어 발음해 본 적이 없는 듯

‘성추행’이라는 낱말 앞에서 주춤하고 더듬는다.

여자는 순간 ‘만취 승객의 추태’를 ‘만취 승객의 성추행’으로 둔갑시켜 일을 키워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한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자의 행동은 여자에게 성적인 모욕감이나 수치심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만히 있는 나를’ ‘하필 길도 막히는데’ ‘멀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니까짓게 도대체 뭔데’ ‘술 처먹고 건드렸다’는 것에 크게 꼭지가 돌았던
 
것뿐이었다.

 

#8

또 한명의 승객과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던 남자는

술 취한 사람들이 그렇듯

어느 한순간 기습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떠난다.

버스 안은 평온해졌다.

여자는 원래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아 조용히 음악을 듣는다,

뒷자리에 앉은 아주머니는 사건의 개요를 묻는 다른 승객에게

‘아가씨가 참 용감하고 대담하네. 우리 딸 같으면 그냥 당했을텐데’라는 코멘트를 붙

여 설명을 한다.

그녀는 ‘오늘 버스 안에서 아주 성질이 지랄 맞은 기집애를 봤다’는 후일담을 남길 것

이다.

 

#9

여자는 기사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버스에서 내린다.

시내의 백화점에서 남편을 만났다.

여자가 버스에서 일어선 순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고

남편의 전화를 받는 순간 남자가 다리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남편은 열린 폴더를 통해 버스 안의 상황을 생중계로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유행어처럼 ‘시크한’ 남편은

여자가 버스 안에서 쌈박질을 마치고 막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다른 얘기를 한다.

‘나 아까 싸웠잖아’

‘아! 맞다! 잘했어’

밖에서 당하고 집에 와서 우는 것 보다는

혼자 씩씩하게 싸워 이기고 돌아오니 마음이 한결 놓인단다.

여자는 평소 ‘때리는 한이 있어도 맞고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자식을 가르치

는 부모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때리고 들어온 일에 대해 칭찬을 받고 나니 잠시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도대체 감당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자녀의 인격과 자긍심을 어떻게 지켜줘야 할까.

 

#10

시간이 지날수록 여자는 마음이 불편하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몰려오면서 계속 불쾌해진다.

여자의 남편은 간단하게 정리한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편히 못 잔다고.

그러니까, 여자는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한 사소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술 취한 남자가 평소에 나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에는 나쁜 사람이었다.

여자는 여자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나쁜 사람을 자신의 방식대로 대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아마도 알콜중독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

가 아니었을까)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정말 격투기를 배워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허무하고, 돌발적인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기선 제압,

그리고 절대로 흥분하지 않기.

절반은 이겼고,

절반은, 참패였다.

 

+ a paper cut

창틀위의 먼지 | 2010-01-1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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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의 피가 파랗게 어는 듯한 기분과 함께
바이올린 가장 높은 음 현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놀랍도록 다양한 쓰임새, 지식과 정보의 보고라는 이로움 때문에
조심히 다루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아픔을 줄 수도 있는 물질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는다.

여느 때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기습적으로  찾아 온 통증에
머릿 속 가득 화~한 박하향이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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