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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와 뉴타운, 그리고 조직화...

마실 | 2011-11-30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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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4년 간, 시민운동을 하면서 '조직'이라는 것을 시도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였다. 경험과 연구를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조직은 2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프로젝트를 통한 조직화,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을 통한 조직화. 대다수 시민단체는 프로그램을 통한 조직을 시도한다. 우파의 경우 프로젝트를 통한 조직을 더욱 잘 한다. 청년단체의 경우 SIFE라는 단체가 가장 대표적으로 프로그램을 통한 조직을 시도하는 집단이었다. 내가 진보정당에 제안하려고 했던 것은, 사회공익활동을 통한 청년집단의 조직이었다. 프로젝트를 프로그램화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장 잘 했던 곳은 아름다운 가게였다.

이 고민을 묵혀둔 체 몇년이 지나면서, 문득 '뉴타운 정책'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뉴타운 정책에 대해 말로만 듣고 있었는데, 두리반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그 구체적인 실체를 만났다. 뉴타운에서 기억할 만한 지나침 하나. 바로 '조합'의 동의였다. 뉴타운 정책의 이해당사자인 '조합원'이 형성되면, 이들의 동의를 통해 뉴타운 사업의 가부가 결정된다. 이 조합원의 숫자는 사업 하나당 1000여명이 훌쩍 넘어선다. 이 숫자는 대단한 숫자다. 문득, 이들이 뉴타운 프로젝트를 위해 동원된 조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조직된 시기가 언제인고 하니, 이명박이 서울시장이었을 시기이다.

뉴타운 사업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일단 재껴놓자. 이를 정당정치의 '조직화'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뉴타운 프로젝트는 엄청난 사업이 아닐 수 없다. 서울시가 추진한 뉴타운 지정지역이 200여곳이라고 알고 있다. 200여 곳에 평균 1000여명이 조직으로 동원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20만명의 숫자가 뉴타운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된다. 이 20만명의 사람들은, 이명박의 뉴타운 정책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다. 민주당을 포함하여, 야당의 당원수를 모두 합쳐도 10만이 되지 않는다. 참여연대건, 민주노총이건. 뉴타운 정책에 연계된 이 20만명의 시민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여기에 덧붙여, 평균적으로 뉴타운 정책과 관련되어 혜택을 보리라 예상되었던 주민의 숫자는 조합원의 숫자보다 5배가 넘는다. 실제 100만명의 시민이, 순전히 '뉴타운 정책'에 의해 이명박을 적극 옹호하였던 것이다. 이게 2003년~5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내 눈 앞에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은 거대한 경제적 이익. 이것이 노무현 정부 때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다. 2005년 사이에 있었던 '황우석열풍'으로 드러난 거대한 파시즘의 징후. 그 배후에 깔려있던 물적토대다.

서울시장 이명박. 우리는 그를 청계천 시장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청계천에서 인정된 뚝심, 그것이 다시 이명박으로 하여금 뉴타운 공약을 실현시켜낼 수 있는 듬직한 CEO라는 신뢰/확신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 힘이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명박은 '기획된' 대통령이다. 과연 누가 그를 기획했는가? 나는 가끔씩 그의 배후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힘을 느낄 때, 오싹한 느낌을 받곤 한다.



+ 안철수 신드롬, 그리고 좌파정치

마실 | 2011-09-0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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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함께 밥을 먹었다. 직장동료는 옛 운동권, 대기업 CSR 경력자, 그리고 그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안철수 이야기가 나왔다. 박원순 이야기도 나왔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땐, '두 분이 그러면 안되지...'라고 하면서도 입가엔 화색이 돋는다. 훼손되면 안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만만치 않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그런 것이 깔려 있다. 사실 안철수는 잘 몰라도, 박원순의 경우는 확실히 지금까지 해놓은 업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 그가 이렇게 정계로 들어선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고. 응원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다.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문득 노회찬의 이야기가 나왔다. 두 사람이 피식 웃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갑자기 옛 운동권이 내게 훈계를 한다. 지금까지 좌파 정당이 이렇게 사람들에게 원성을 사거나 비판을 받은 적이 없다고. 그저 지금까지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이제는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문득 그가 직장 상사라는 것을 까먹어버렸다.

"그래서 사회가 파시즘으로 되어가는 것이죠."

세부 논쟁이 이어졌다. 온갖 치졸한 언론플레이에 대해 내가 왜 이렇게 수세에 몰리며 대답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결국 그는 내가 말한 한마디에 논쟁을 접고 물러났다.

"국참당이 변수가 아니다. 문제는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다. 일심회 사건 때 당원정보가 북으로 넘어갔고, 당대회에서 관계자 징계가 부결되었다. 그에 대한 반성이 없었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가 없었다. 그것 하나만 있었어도, 나는 이번 통합을 찬성했을 것이다."

논리적인 토론이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전하고, 그 감정에 대답한다. 감정을 조직하는 것은 언론이다. 언론을 조직하는 것은 권력이다. 그 권력을 만드는 것은 민중이다. 민중은 다시 감정에 좌우된다. 악순환, 그 연결고리 속에서 우리 진보신당은 길을 잃었다. 길을 잃고 3년을 방황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지도자들이 내어 놓은 안은 '통합'이다. 진보대통합, 야권통합 등.. 반대파의 대안도 통합이다. 이들은 진보 소통합을 이야기한다.

그 안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이 없다. 당헌을 뼈대로, 강령을 피와 살로, 당규를 피부를 삼아 만들어진 생명체로써 정당. 이 하나의 정당을 만들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은 한땀의 수고. 그것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철부지, 순혈주의자, 어린아이가 되어버린다. 정당은 보수적이어야 한다. 쉽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정당에는 권력에 대한 이합집산만이 남는다.

그리고 안철수를 본다. 안철수는 결국 '야권통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야권통합이 국민의 뜻이 아니다. 지금의 한나라당이 틀렸다는 것. 그에 대한 강한 반감. 그 대안으로써 '야권통합'. 그것은 하나의 안이다. 그것만이 대답이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강한 대답 중 하나. 하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대답. 그것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은 결국 '안철수'의 등장으로 증명이 되었다. 안철수는 처음부터 야권통합의 흐름 밖에 있는 존재였다. 통합후보와 한나라당의 후보 모두를 합친 지지도보다 안철수의 지지도가 높다. 시간이 흐를 수록,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민심을 읽자면. 한나라당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실현하는 방법은 아주 여럿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흐름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 어떤 흐름은 잘 타고 가야 하고, 어떤 흐름은 피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흐름을 탈 것이고, 어떤 흐름을 피해갈 것이냐. 이건 결국 철학과 신념의 문제다. 나는 최소한 정당의 운영방식은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수 많은 사람의 신념과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이것을 조율하는데 굉장한 에너지가 든다. 그것을 감당해야 하고, 소통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며, 구성해야 한다. 지금의 통합논의는 나의 신념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통합 논의에 반대하여왔다.

'신념'은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내 신념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진보신당을 지지하고, 당원으로써 활동하는 이유. 그것을 핍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어제의 점심식사에서, 나는 정치적 신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권한을 위협받았다. 그러면서 망가지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의 파시즘적인 징후가 너무 짙어져버렸다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섬세한 동료들이 프로파간다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며, 가끔씩 우리 사회가 절망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좌파정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 원점에 선 물음을 제대로 직시하고, 대답을 궁리할 자신이 없다.

+ 시류에 휩쓸린 진보신당

마실 | 2011-09-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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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과 이명박에 대한 거부감. 지난 지방선거의 민심이었다. 그 바람이 희생양을 요구했고, 그 희생양으로 진보신당이 선택되었다. 이는 군중심리의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지, 정치적 선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희생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놀이를 깨는 방법, 정교한 언론플레이, 죽음 속에서 살아남기. 군중심, 놀이, 진지하되 속지 말것! 통합을 주도했던 정종권류의 '담론'이 부당했던 것은, 시류에 맞게 진보신당의 비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들의 바램이 야권통합에 있다. 이 말은 절반은 맞다. 하지만 절반은 아니다.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국민들의 바램은 야권통합이 맞았다. 하지만 그것이 2011년에도, 2012년에도 국민의 바램일 수 있을지 아닐지 알 수 없다. 당장 2011년 안철수의 등장으로 드러난 국민의 바람은 '야권통합'이 아니었다. 안철수도, 박원순도, 진보신당도, 모두가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인 길이었다. 다만 당시 진보신당의 상황이 안좋았을 뿐이다.

진리는 3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대응설, 하나는 정합설, 하나는 합의설. 국민의 바램이 곧 진리이다라는 말은, 위험한 말이다. 정합설과 대응설을 잃은 합의설은, 파시즘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원래 파시즘은 국민의 바램 위에서 도래한다. 진보신당은 철저하게 가치정당이다. 노동자의 삶, 그 속에 얽혀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 그것을 실천함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함으로써. 진보정당의 기치가 서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이냐, 그 가치를 현대 사회/현실에 맞게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이 고민 위에서 우리는 '시류'를 다시 읽어내야 한다. 이 과정은 때론 국민의 바램에 부합하고, 때론 그것을 거스른다. 거스르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러 올라가는 연어를 노래하는 강산에는 진보정당의 어떤 모습과 닮아있다.

통합파의 실패는 결국 시류에 휩쓸려 당의 비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 '시류'에 부합하는 행위는, 그 이면에 '권력지향적' 행위와 닿아있다. 통합파는 늘 '정당한 권력'의 확대를 외쳐왔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이어온다. '권력의 확대는 가능한가?', '확대된 권력은 정당한가?', '과거 경험한 권력을 둘러싼 '암투'를 제어할 수 있는가? 그것을 포함한 권력의 확대는 과연 확대라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통합파는 이런 물음에 대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강령'에 대한 극복이 아니라 '시류'에 편승한 비전이었기 때문에 내용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였고, 패권주의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방법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민노당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제어할 수 있는 합의문을 도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과거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결과로 진보신당에게 남은 것은, '노심조'로 상징되던 한국 노동자운동의 상징. 그것을 잃었다.

약간의 기획력과, 전화기, 두손과 두발밖에 없던 나는. 그저 진보신당에 적을 두고, 진보신당의 이름을 빌려. 그 대의에 동의하는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수십명이나 당에 초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좌파라는 사람, 사회운동에 관심있는 사람, 혹은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보신당에 부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당원 중 한 사람으로써, 그들의 부채의식만 자극해도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막막하다. 이제 진보신당은 한국 사회운동의 '적자'가 아니다. 그것이 훼손되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가장 큰 자원은 '노심조'라는 세 사람의 인물이 아니라, 이 세사람 위에 쌓여있는 한국 진보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통성. 그리고 역사성에 있었다. 지금은 이것이 유실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는 '박원순'이라는 새로운 상징위에 쌓여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원순 류의 시민운동의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안다. 기업에게 아무리 사회참여를 이끌어낸다고 하더라도, 노동환경은 변하지 않고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박원순 본인도 최저임금에 대한 개념이 없기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커리어로 인력을 사기. 그안에서 망가진은 개인의 삶. 진보정당의 역할은 노동에 있다. 이 노동의 문제는 정책 하나 따 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보신당은 통합논의와 그것을 주도한 민주노총과의 힘싸움. 결국엔 그것에 진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대의를 잃었다. 이제 진보신당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당의 당헌과 강령에 다시 눈을 돌린다. 애초에 우리가 합의한 원칙. 한국에서 진보정당이 필요한, 그리고 우리가 정당 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통합 논의 속에서 내동댕이쳐진 '역사'의 편린을 붙잡고,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 속에서. 다시 진보신당을 되돌아본다. 결과적으로 내게는 당을 내동댕이 친 노심조보다, 김은주가 훨씬 귀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녀는 우리 당이 세운 원칙 위에 있다. 물론 김은주보다, 더욱 귀한 것은. 시류에 휩쓸려 바닥까지 팽겨쳐진 상황에서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이 길 위에 진보가 있다고 말해주는 바로 진보신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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