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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9 15:41 │ 스크랩 0 │ 추천 1
아베로에스와 뒤틀린 유럽철학사

- J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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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참고 자료가 부족한 동네에 살 때. 내 가진 몇권의 철학사 책으로 정리한 메모인데 나주에 다시 한번 공부해보리라 마음먹어 놓고 아직까지 미루고 있다. 벌써 1년. 미루고 있는 공부가 왜 이렇게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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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사회가 저물어 가던 시기..
맑시스트들이 세상을 보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누가 뭐래도 '생산관계'를 통한 세상의 분석이다. 전통적으로 맑스는 생산관계의 역사를 '고대 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 - 미래(??) 사회주의'고 보았는데, 이 생산관계의 변천이 보편 역사인가 아닌가에 대해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적어도 유럽과 '아랍(!!)' 세계에는 이 같은 분석을 적용시키는게 타당하게 보인다.
이때 고대 사회는 '그리스-로마' 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생산관계는 기본적으로 노예제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유'가 그토록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노예'에 비해 자유를 가지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이 유독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노예 없는 세상이란 꿈꿀 수도 없는 사회였다. 그리스 노예제가 중소규모였다면 로마의 귀족들은 라티푼티움 체제 아래에서 대규모 노예를 거느린다. 이 노예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은 계속해서 팽창 전쟁을 했고, 더이상 팽창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이 제도는 무너지게 된다. 로마의 붕괴는 기본적으로 '전쟁노예'를 더이상 확보할 수 없었을 때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큰 파이를 나눠 가질 수는 없는 법인 듯 하다. 대규모 농장인 라티푼티움은 필연적으로 중소규모의 자연농을 몰락시켰고, 일찌감치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시도가 실패했을 때 부터 로마는 극심한 빈부 격차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스 시대에 작은 규모의 폴리스를 고민하던 시민들이 철학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지만, 로마시대에는 큰 영토 속에서 오히려 개개인이 소외되는 상황 속에서 종교를 통해 현재 자기가 처한 삶에 대한 위로를 받고자 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사실 상 도시의 수호신들이었기 때문에 세계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인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시기에 문화-사상적으로 헤게모니를 획득한 것은 기독교였다.
로마시대에 기독교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일반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교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강조했던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가지였다. 쉽게 구원을 약속한 기독교는 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 쉬이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유리한 이점 중 하나였다. 둘째로 기독교 신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눠주며 당시의 빈민 구제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계속되는 박해에 굴하지 않는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순교는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드라마를 만들어내었던 것 같다. 예수가 죽고 사도 바울이 교리를 확립해나가면서 기독교는 결국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 사회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았을 때는, 이미 로마의 팽창이 극에 이르렀을 때였다. 라티푼티움을 유지할 수 있는 대규모 전쟁 포로가 더이상 유입되지 않는 상황에서 로마는 거대한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동서 로마의 분열, 군인황제의 폭정등이 겹치면서 제국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471년 서로마의 수도가 게르만에게 함락되었을 때, 우리는 실질적으로 '고대' 사회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2. 아우구스티누스와 엇갈린 시간
자본주의 사회는 중세 내부에서 태동했다. 하지만 중세 사회는? 말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대의 마지막 시기에 중세 사회를 규정짓는 새로운 생산관계인 봉건제의 태동을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봉건제는 9c경 프랑스에서 모습이 확인된다. 로마가 멸망한 것은 400년 경이니, 실제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생산관계 변동은 400년 이상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봉건제는 고대 사회 내부에서 태동한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가 무너진 이후 극심한 혼란기 속에서 서서히 생겨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C경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이때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중세시대 스콜라 철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스페인의 철학자 아베로에스는 유럽 철학사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유럽에서 먼 북아프리카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럽 철학사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속에는 무슨 기구한 사연이 숨어있을까. 이는 나중에 아베로에스를 이야기할 때 언급할 기회가 있겠다.
로마사회를 고대라고 말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고대 철학자이다. 철학자는 그 시대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정해졌을 때, 교리의 통합을 고민했고, 기독교 시대에 무너지는 제국의 미래를 그는 신의 음성을 빌어 설명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고대 로마사회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 로마 철학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왜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의 철학자로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걸까? 나는 여기서 무리하게 중세를 공격해들어가며 자신들의 위치를 확립하고자 애쓴 근대인들의 권력의지를 느낀다. 그리스와 로마는 그들이 되돌아가야 하는 이성의 빛이 만개했던 시기고, 중세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가려진 암흑의 시대일텐데, 자신들이 되돌아가야 하는 찬란했던 고대 로마의 사회가 전성기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 국가였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애써 로마의 역사에서 기독교의 이름을 빼고자 했던 것을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중세라는 이름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조금 더 계보학적인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 아베로이스와 뒤틀린 유럽
유럽의 중세에 철학이 있었다면 흔히 소개되는 서양 철학사에서는 스콜라 철학이 유일하다. 중세 봉건제가 생기며 동시에 함께 발전한 것은 도시와 도시의 주인인 부르주아 층이었다. 12세기 유럽의 수확량이 급증하며 생겨난 잉여생산물은 그것의 교환을 통해 부를 축적하게 하는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을 만들어내었다. 점차적으로 중세 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하던 부르주아 계급은 꼬뮌 운동을 통해 계속해서 봉건귀족과 성직자 계급과 충돌하였다. 스콜라 철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인해 생겨나는 사회적 갈등을 신앙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들이었다. 스콜라 철학의 성직자들은 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에게 대량의 기부금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바늘 위에 천사가 얼마나 많이 앉을 수 있을까에 대한 논리들까지 연구했다.
그런데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철학을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대결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중기 중세에 가장 널리 알려졌던 스페인 사라센의 철학자 아베로에스의 철학에 대한 대결에서 시작하였다.
아베로에스의 철학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 일대에서 아베로에스를 위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계승자들이 꽤나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 같다. 아베로에스는 라파엘의 유명한 그림인 '아카데미아'에서 등장할 정도로 당대에는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 제논, 디오게네스와 비견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학자였던 것 같다. 지리적으로 북아프리카 출신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럽 철학에 속하지만, 스페인 출신 아베로에스는 아랍의 철학자로 칭한다. 타당한가? 중세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아베로에스 등의 스페인 철학자들에 의해 유입된 것 같다. 아퀴나스는 그것을 당대 수도원의 입맛에 맞게끔 바꿔놓은 일 정도를 한 듯 하다. 생존 당시 영향력으로 생각할 때 아베로에스는 아랍 세계보다는 유럽 세계와 훨씬 많은 관계를 하고 영향을 준 듯 하다. 유럽의 철학사에서 아베로에스를 제외하는 것은 타당한 것일까?
4. 정리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와 로마제국 등 헬레니즘 세계는 '유럽 - 비잔틴 - 아랍'을 연결시키는 문화권을 태동시켰다. 이 속에서 우리가 중세라고 칭하는 시기에 창조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곳은 비잔틴과 아랍에 있다. 유럽은 혼란된 중세 초기를 딛고 난 이후부터 이들이 발전시킨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즉, 유럽과 중국의 역사는 완전히 단절된 두개의 역사로 볼 수 있지만, 유럽과 아랍은 동떨어진 두 개의 역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근대 유럽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이야기되는 경험 과학은 그리스에서 씨앗을 내려 아랍에서 줄기를 틔우고 유럽에서 꽃을 핀 것 뿐이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1234567890 이라는 숫자가 '아라비아숫자'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저 같은 문화적 교류와 상호 소통들이 무시되며 그리스에서부터 로마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를 '유럽'이 혼자서 독점한다는 사실이다. 아랍의 역사나 문화를 서술하는 역사서들은 하나같이 이슬람교가 생겨난 632년 정통 칼리파 시대를 자신들 역사의 시작으로 잡는다. 그 전의 역사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그리스와 오리엔트 제국, 그리고 로마의 역사이다. 이들은 그 역사를 함께 공유한 '역사공동체'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05.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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